채명신장군의 비밀!
지난 2013년 11월 25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의
제2 병사묘역..
별세하면서
‘장성묘역 대신
병사묘역에 묻히기
원한다’는 유언을 남긴
베트남전의 영웅
고(故) 채명신(蔡命新)
중장(中將 ☆☆☆)
(향년86세)의 삼우제가
치러졌다.
부인 문정인 여사와 아들,
딸을 비롯한 유족들,
베트남전 참전 노병들이
추모 예배를 하며 고인을
기렸다.
이 자리에선 4일장으로
치러진채 장군의 장례기간
내내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았던
채 장군의 동생 채모(76)
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흘간 밤샘하며
조문객을 맞으며 쌓인
피로를 걱정하여
“삼우제는 직계가족만
으로 치를 테니 나오지
말라”는 문정인 여사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 채씨는
채 장군이 60년 넘게
숨겨온 또 다른 미담의
주인공이다.
채씨는 채 장군이
1951년 초 강원도에서
생포한 조선노동당
제2비서겸 북한군
대남 유격부대 총사령관
(중장) '길원팔'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녔던
전쟁고아였다.
당시 육군 중령이었던
채 장군은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며
강원도 내에서
암약하던 북한군
색출작전을 펼쳤다.
채 장군에게 생포된
길원팔은 채 장군의
전향 권유를 거부하고
채 장군이 준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러면서 “전쟁중
부모 잃은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다.
저기 밖에 있으니
그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를
시켜달라” 고 부탁했다.
적장(敵將)이지만
길원팔의 인간됨에
끌린 채 장군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그 소년을 데려와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켰다.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 장군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채 교수는 10여 년 전에
은퇴했다.
두 사람은 채 장군이 숨질
때까지 우애 깊은 형제로
지내왔다고 한다.
채 장군의 자녀들은
그를 삼촌으로,
채 교수의 자녀들은
채 장군을
큰아버지라고 부른다.
문정인 여사는 지난달
29일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중앙 SUNDAY
기자와 만나 “채 장군이
길원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채 교수를
동생으로 맞은 것”이라며
채 장군이 생전에
길원팔 칭찬을 많이
했다고 한다.
적장이긴 하지만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문 여사는 "채 장군이
채 교수(아들이 아닌)를
동생으로 입적한 것은
채 장군의 나이
(당시 25세)가 젊었고
채 교수와의 나이
차이도 11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
이라고 말했다.
이어 “(채 교수가)형님이
별세하신 데 대해 크게
슬퍼했다.
나흘 내내 빈소를 지켰다"
고 말했다.
채 장군은 총각 시절
본인이 손수 소년을
돌보다 그가 고교생이
됐을 무렵 문 여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주변 사람에게 소년을
맡기고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서울대에 진학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채 장군은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가 돼 군 생활이나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채 장군에겐 친동생
'채명세'씨가 있었다.
하지만 1951년 채 장군이
연대장으로 복무하던
5사단의 다른 연대에서
소대장으로 배속되어서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이에 따라 채 교수는
형제 자매가 없던
채 장군에겐
유일한 동생이 됐다.
채 장군은 당시 “그의
인생이 중요하니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문 여사도 지난 29일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절대
주변에 알리지 않고
지내왔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라며
기사화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모 신문지는
적장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닌 소년을 동생으로
입적시켜 대한민국의
엘리트로 키운
채 장군의 선행이
이념 갈등 해소와
남북 화해의 귀감이
될 것으로 판단해
기사화를 결정했다.
장군은 한국의 태권도를
보급 발전시키는 데
공로가 컸으며
주월 한국군 사령관직을
훌륭히 치러낸 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면전에서
직접 반대하고
대장 진급에도
탈락되는 등 불이익을
받았으며 예편하여
브라질 대사를
역임하기도 했으나
지병으로 86세에
운명하였다.
수많은 공적에도
장군묘역에 묻히길
거부하고 부하들이
있는 곳 사병묘역에
묻히기를 소망했던 장군,
적장의 간절한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인 장군,
적지의 고아를 기르고
키워 내고도 끝내
비밀로 하고 간 장군,
절대권력자인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면전에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표현한 장군...
채명신 장군이야말로
진정한 사나이자
참 군인이 아닐까?
호국보훈의 달에
다시 한번
사령관님을 추념합니다!
- 옮긴글 -
*옮긴이 Note*
KMA 4학년 하계군사
훈련 기간 이었던
1969년 8월,
제 2군사령부(대구)를
부대방문 했을 때
제 2군사령관
(군 생활 마지막 보직)
으로 계셨던
채 사령관께서
189명 사관생도들을
일일이 악수하시며
환영해 주시고
다과를 베풀어 주시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채 사령관님의 팔(八)자
눈썹은 인상적이었다.
국가유공자 묘역과
장군묘역에 안장을
마다하고 전우들이
안장된 병사들의 묘역에
병사들과 함께 잠드신
경우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이었던 일이다.
나의 외람된 생각이지만
채명신 사령관께서
대장(大將 ☆☆☆☆)으로
진급한 다른 장군들에
비하여 자질과 능력,
인품이 부족하여
중장(中將 ☆☆☆)으로
군생활을 마친 것은
결단코 아니다
아마도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면전에서 반대한 것이
그 이유일 것이리라
채명신 서령관은
국민들로부터 믿음과
사랑을 받았으며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몇 안되는
참군인이었다.
군인으로써 나라를 위한
싸움터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고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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