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 게시판에는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비방이나 험담은 자제 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내와 나 사이 - 이 생짖-

관리자2024.05.27 13:29조회 수 24댓글 0

    • 글자 크기

 

 

 



 

아내와 나 사이

 

이 생 진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지난 2019년 봄 평사리 최참판 댁 행랑채 마당에서

박경리 문학관 주최로

‘제1회 섬진강에 벚꽃 피면 전국시낭송대회’가 열렸습니다.

 

60여 명이 참가한 이 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낭송시가

바로 이생진 시인의

이 작품입니다.

 

7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성 낭송가의 떨리고 갈라지는 목소리에 실려 낭송된 이 시는

청중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였습니다.

좋은 낭송은

시 속의 ‘나’와

낭송하는 ‘나’와

그것을 듣고있는 ‘나’를

온전한 하나로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내 몸의 주인인 기억이

하나둘 나를 빠져나가서

마침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나이.

 

나는 창문을 열려고 갔다가

그새 거기 간 목적을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에 갔다가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앞이 막막하고

울컥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차분하게

이 참담한 상황을 정리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일 뿐이라고.

 

그리고 자책하는 목소리에 담아

우리를 나무라지요.

거창하게

인생이니,

철학이니,

종교니 하며

 

마치 삶의 본질이

거기에 있기나 한 것처럼 핏대를 올리는 당신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고.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내와 나 사이’의 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바로미터인 셈이지요. 

 

오늘도 당신은 좋은일만 있을겁니다.

 

 

2024년 5월 27일 월요일

 

 

 

 

 



    • 글자 크기

댓글 달기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83 시인 나태주가 말하는 어른, “잘 마른 잎 태우면 고수운 냄새 나” 관리자 2024.04.09 7
282 김종천님의 '그림자 친구' 감상 강추 keyjohn 2015.07.15 137
281 아프레 쓸라 (Apres cela) 관리자 2024.05.30 11
280 Anything That's Part of You 이한기 2023.11.11 97
279 Saguaro National Park in Tucson, rizona.(Saguaro Cactus), Big Balanced Rock Chiricahua National Monumnt in Arizona 관리자 2024.02.14 46
278 트바로티 김호중이 수감된 구치소에서 매일 아침 일어나는 일 관리자 2024.05.30 19
277 47년 전통 이상문학상 운영사 바뀐다 관리자 2024.04.24 18
276 애원 - 천 준집 관리자 2023.12.09 26
275 하이쿠(俳句, 배구) 감상 이한기 2024.05.29 23
274 나그네 관리자 2024.05.30 15
273 명언(名言) 이한기 2024.06.27 23
272 뮬아양망(物我兩忘) 이한기 2024.07.11 13
271 애문 9월 정모 결과 보고 keyjohn 2022.09.12 62
270 봄비 - 심훈 - 관리자 2024.02.18 25
269 전도몽상顚倒夢想 이한기 2024.03.05 29
268 비오는 날의 기도 - 양광모- 송원 2024.01.09 15
267 USS Carl Vinson (CVN-70) Nuclear Propelled Aircraft Carrier 관리자 2024.02.04 48
266 그리도 미련이 많은가! 이한기 2024.03.07 36
265 예수님의 학력 이한기 2024.05.22 22
264 “어쩌면 시 쓰기가 멈춰지지 않아서”…‘여든’ 나태주 시인의 봄볕같은 고백 [북적book적] 관리자 2024.05.30 320
이전 1 ...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33다음
첨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