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을 본 아침에 /김복희
눈이 올 것이란 예보로 밤에도 몇 번 창밖을 살폈지만 비만 오고 있었다.
어두워서 진눈깨비인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늦잠에서 깨어나 급히 커텐을 여니 땅바닥은 말짱하고 자동차 위에만 소복히 눈이 쌓여
옛 친구를 만난 듯이 기쁘다
얼른 카메라 샷터 를 눌렀다
겨울에도 눈 을 볼수 없는 켈포니아 친구에게 사진을 보내며 여기는 사계절이 있어
눈 을 본다고 자랑? 을 하였다
지금은 햇빛 쨍쨍하여 나뭇잎이 보석처럼 아름답다 아까워 사진을 찍었지만 실물처럼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영화 촬영감독들은 저 아름다움을 어찌 표현 할 수 있을까 ?
예전에 영화 출연할 때 몇 번 촬영 감독이 멋있게 보여 촬영을 배우고 싶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자로선 중노동이라 불가능으로 알았는데 지금은 장비도 가벼워져서인지 영화나 TV쪽에 여성 카메라맨이 몇이 있다. 고된 훈련을 마친 장교처럼 그녀들이 대단해 보였다.
어려서부터 써커스를 보면 높은 그네를 타고 싶었고 영화나 연극을 보면 배우가 되고 싶었고 그림을 보면 베레모 쓴 화가가 되고 싶었고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고 싶었고 무용을 보면 발레니나 가 되어 백조의 호수를 추고 싶었고 노래를 들으면 성악가가 되고 싶었고 소설을 읽을 때 면 작가가
되고 싶었다 꿈에도 대통령이나 정치가가 되고 싶지는 않았었다
1949년 중학교시절 전차를 타고 집에 가는데 징그럽게 생긴 빵떡모자를 쓴 아저씨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 보다가 내가 내릴 때 뒤 따라 내려서 집까지 따라 들어왔다 나는 무서워 내방에서 달달 떨고 있는데 엄마의 웃음소리가 나서 가만히 엄마 곁으로 갔다 엄마에게 내민 그의 명함은 황금정 (지금의
서울 을지로) 어느 여관에서 관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저 학생은 뛰어난 예술가가 될 것이다' 라고 하니 엄마가 "얘는 노래도 춤도 그림도 다 잘 한 다 "라며 자랑을 하는 것이다 결혼 후 스물아홉살이면 미국에 가서 공부할 것이며 예술가로 이름을 날릴 것이란다( 6.25전이라 그 당시 미국은 생각지도 못한 머나먼 나라였다)
관상쟁이 말 대로 미국이란 나라를 가끔 떠 올리며 살다가 남편을 만났을 때 그는 미국 유학수속 중이었고 영문학 전공인 그가 영화감독 공부를 할 것이라니 운명처럼 끌려 결혼을 하였다 남편은 혼자 유학을 떠났었다.
나는 29세가 아닌 아주 늙어서 결국 미국에서 살고 있으며 유명한 예술가도 못 되었지만 요즈음엔일본의 '시바다 토요'보다 조금 젊은 나이에 글 재미가 생겨서 자판을 드드리는 취미로 살고 있다
성악가도 못되었지만 교회에서 매주 합창을 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으나 나이 때문에 한계가 보이니 내년부터는 그만 둘 참이고
글은 눈이 안보이면 돋보기 쓰고 자판만 보이면 될 것 같아 잘 쓰지도 못하면서도 죽을 때 까지
고갈되지 않을 추억이 많아서 마음이 바쁘기만 하다.
현대인은 인터넷과 운전을 해야 한다며 그토록 지겹게 잔소리? 해대던 남편 덕에 아주 좋은 친구인 컴퓨터 앞에 앉으면 나는 시간가는 줄 모른다.
나이차이가 많았지만 나보다 훨씬 진취적인 남편이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보다 성숙해졌다
이제 떠날 때에도 그를 따라 아주 잘 갈 준비를 해야 한다.
아틀란타에 첫눈이 온 아침에 01-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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