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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못할 수도

이한기2024.06.27 19:00조회 수 11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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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못할 수도

                   Jane Kenyon

 

건강한 다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시리얼과 달콤한 우유와

흠 없이 잘 익은 복숭아를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개를 데리고 언덕 위

자작나무 숲으로 산책을

갔다.

오전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오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누웠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은촛대가 놓인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못할 수도 있었다. 

벽에 그림이 걸린 방에서 

잠을 자고 오늘과 같은

내일을 기약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못하게 되리라는 걸

 

[시의 해설]

시인이며 번역가인 제인

케니언(1947~1995)이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쓴 시다. 대학생

시절, 문학을 강의하던

19살 연상의 시인  도널드

 홀을 만나 결혼한 제인은

뉴햄프셔의 농장에서 스무

해를 살았다.

제인과 도널드의 삶은

다큐멘터리(함께한 삶

Life Together)으로 제작

되어 에미 상을 수상했다. 

도널드 홀도 자연과

인생에 대한 경이감을

시와 산문으로 표현한

미국 계관시인이다.

그는 죽어 가는 아내를

보살핀 경험을 이렇게

토로했다. 

'아내의 죽음은 나에게

일어난 최악의 일이었고,

아내를 보살핀 것은

내가한 최고의 일이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

- 가벼운 산책, 함께하는

식사, 그림 감상,  정겨운

포옹, 내일을 기약하며

잠드는 일 등이 얼마나 큰

복인지 우리는 사실 잘

모른다. 그것들은 그냥

일상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일상은 얼마나

많은 사고, 갑작스러운

병과 재해에 가로막히는가?

 

몇 해 전, 나는 갑자기

쓰러져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됐었다. 말을 하고

눈을 깜박이는 것 외엔

목 아래가 완전히

마비되었다.

강아지가 얼굴을 핧아도

쓰다듬어 줄 수가 없었다.

마비의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사흘 뒤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새벽에 혼자 힘으로 일어나

마당으로 걸어나갈 때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갑작스런 마비에서 회복된

것이 기적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활동이 기적이 되었다.

지금 나는 건강한 다리로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간다.

인도 여행을 하고, 히말라야

트레킹을 간다.

웃고 농담하고, 감동하고,

연필 쥔 손으로 글을 쓴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과 별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

하지 말라. 지금 그들을

보러 가라"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인생 수업 : Life Lesson>

에서 한 말이다.

 

놀랍지 않은가, 그해에 막

뉴햄프셔주의 계관시인으로

선정된 시인이 48세에 생이

끝나 가는 것을 절망하거나

비관하는 대신 삶의 사소한

행위들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두 다리로

걷고, 우유에 시리얼을 타

먹고, 복숭아의 둥근 맛을

깨무는 것까지, 그것들이

곧 불가능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소소한

일상은 얼마나 복된

시간인가. 살아 있다는

것은 큰 기회이다.

그 '특별한' 일상들을

사라질 날이 곧 올것이기

때문이다. 물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두 발로 땅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다. 삶은 수천

가지 작은 기적들의

연속이다. 그것들을 그냥

지나쳐선 안 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에는 적혀 있지 않지만

행간(行間)마다

 '늦기 전에 깨달으라'라는

말이 숨어 있다.

 

         - 류시화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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