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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 장군의 비밀

이한기2024.06.15 13:56조회 수 31추천 수 1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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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 장군의 비밀

 

지난 2013년 11월 25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제2병사묘역,별세하면서

‘장성묘역 대신 병사

묘역에 묻히기 원한다’는

 유언을 남긴 베트남전의

영웅 채명신(蔡命新)

사령관(향년86세)의

 삼우제가 치러졌다. 

 

부인 문정인 여사와 아들,

딸을 비롯한 유족들,

베트남전 참전 노병들이 

추모 예배를 하며 고인을

기렸다.

 

이 자리에선 4일장으로

치러진채 채 사령관의

장례기간 내내 빈소를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았던 채 사령관의 동생

채모(76)씨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흘간 밤샘하며

조문객을 맞으며 쌓인

피로를 걱정하여

“삼우제는 직계가족만

으로 치를 테니 나오지

말라”는 문정인 여사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 채씨는

채 사령관이 60년 넘게

숨겨온 또 다른 미담의

주인공이다. 

 

채씨는 채  사령관이

1951년 초 강원도에서

생포한 조선노동당

제2비서겸 북한군

대남 유격부대 총사령관

(중장) '길원팔'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녔던

전쟁고아였다.

 

당시 육군 중령이었던

채 사령관은 유격부대

‘백골병단’을 이끌며

강원도 내에서 

암약하던 북한군

색출작전을 펼쳤다.

 

채 사령관에게 생포된

길원팔은 채 사형관의

전향 권유를 거부하고

채 사령관이 준 권총으로

자결했다.

 

그러면서 “전쟁중

부모 잃은 소년을

아들처럼 키워왔다.

저기 밖에 있으니 

그 소년을 남조선에

데려가 공부를

시켜달라” 고 부탁했다.

 

적장(敵將)이지만

길원팔의 인간됨에

끌린 채 사령관은

“그러겠다”고 약속하고 

그 소년을 데려와

동생으로 호적에

입적시켰다.

 

이름도 새로 지어주고

총각 처지에

그를 손수 돌봤다. 

 

소년은 채 사령광의

보살핌에 힘입어

서울대에 들어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이학석사,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서울 유명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채 교수는 10여 년 전에

은퇴했다. 

 

두 사람은 채 사령광이

숨질 때까지 우애 깊은

형제로 지내왔다고 한다.

 

채 사령관의 자녀들은

그를 삼촌으로,

채 교수의 자녀들은

채 사령관을 

큰아버지라고 부른다.

 

문정인 여사는 지난달

29일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중앙 SUNDAY

기자와 만나 “채 사령관이

길원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채 교수를

동생으로 맞은 것”이라며

채 사령관이 생전에

길원팔 칭찬을 많이

했다고 한다.

 

적장이긴 하지만

사나이 중의 사나이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문 여사는 "채 사령관이 

채 교수(아들이 아닌)를

동생으로 입적한 것은

채 사령관의 나이

(당시 25세)가 젊었고

채 교수와의 나이 차이도 

11세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채 교수가)형님이

별세하신 데 대해 크게

슬퍼했다. 

 

나흘 내내 빈소를

지켰다"고 말했다.

 

채 사령관은 총각 시절

본인이 손수 소년을

돌보다 그가 고교생이

됐을 무렵 문 여사와

결혼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주변 사람에게 소년을

맡기고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서울대에 진학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채 사령관은 북한군 고위

간부가 데리고 있던

고아 소년을 입적시킨

사실이 문제가 돼 군

생활과 진급에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채 사령관에겐 친동생

'채명세'씨가 있었다.

 

하지만 1951년

채 사령관이 연대장으로

복무하던 5사단의 다른

연대에서 소대장으로

배속되어서 북한군과

교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이에 따라 채 교수는

형제 자매가 없던

채 사령관에겐

유일한 동생이 됐다.

 

채 사령관은 당시

“그의 인생이 중요하니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다.

 

문 여사도 지난 29일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절대

주변에 알리지 않고 

지내왔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라며

기사화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모 신문지는

적장이 아들처럼 데리고

다닌 소년을 동생으로

입적시켜 대한민국의

엘리트로 키운 

채 사령관의 선행이 

이념 갈등 해소와

남북 화해의 귀감이

것으로 판단해

기사화를 결정했다.

 

채 사령관은 한국의

태권도를 보급 발전

시키는 데  공로가 컸으며

주월 한국군사령관직을

훌륭히 치러낸 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면전에서 

직접 반대하고

대장 진급에도

탈락되는 등 불이익을

받았으며 예편하여

브라질 대사를

역임하기도 했으나

지병으로 86세에

운명하였다.

 

수많은 공적에도

장성묘역에 묻히길

거부하고 부하들이

있는 곳 사병묘역에

묻히기를 소망했던  장군,

적장의 간절한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인 장군,

적지의 고아를 기르고 

키워 내고도 끝내

비밀로 하고 간 장군,

절대권력자인 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면전에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표현한 장군...

 

채명신 사령관이야말로

진정한 사나이자

참 군인이 아닐까?

 

호국보훈의 달에

다시 한번 채 사령관님을

추념합니다!

 

- 옮긴글 -

 

*옮긴이 Note*

KMA 4학년 하계군사

훈련 기간 이었던

 1969년 8월,

 제 2군사령부(대구)를

부대방문 했을 때

제 2군사령관

(군 생활 마지막 보직)

으로 계셨던

채 사령관께서

189명 사관생도들을

일일이 악수하시며

환영해 주시고

다과를 베풀어 주시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채 사령관님의 팔(八)자 

눈썹은  인상적이었다.

 

국가유공자 묘역과

장성묘역에 안장을

마다하고 전우들이

안장된 병사들의 묘역에

병사들과 함께 잠드신

경우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처음이었던 일이다.

 

나의 외람된 생각이지만

채명신 사령관께서 

대장(大將 ☆☆☆☆)으로

진급한 다른 장군들에

비하여 자질과 능력,

 인품이 부족하여

중장(將 ☆☆☆)으로

군생활을 마친 것은

결단코  아니다

아마도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면전에서 반대한 것이

그 이유일 것이리라

 

채명신 서령관은

국민들로부터 믿음과

사랑을 받았으며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몇 안되는 

참군인이었다.

군인으로써 나라를 위한

싸움터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국민들로부터

사랑받고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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