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 게시판에는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비방이나 험담은 자제 해주시기 바랍니다

입속의 검은 잎 - 기형도-

관리자2024.01.02 17:52조회 수 10댓글 0

    • 글자 크기

 

 

 

 

 

입 속의 검은 잎  

 

 

- 기 형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끔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2024년 1월 2일 화요일

 

 

 

 

 

    • 글자 크기

댓글 달기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68 바람이 오면 - 도종환- 관리자 2024.02.11 8
467 백석 시 ‘흰 바람벽이 있어’ 바구지꽃의 정체는? [김민철의 꽃이야기] 관리자 2024.02.21 8
466 나태주 시인의 풀꽃 문학관- 공주시 가볼 만한 곳 관리자 2024.03.05 8
465 필라델피아를 끝으로 7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관리자 2024.03.20 8
464 NYT 이어 美비평가도 격찬한 한국詩 대모 김혜순 작가 관리자 2024.03.24 8
463 Happy Easter Day! 관리자 2024.04.01 8
462 [마음이 머무는 詩] 삼월에 오는 눈-나태주 관리자 2024.04.08 8
461 겨울비 내리는 애틀랜타에서 김태형 관리자 2024.04.08 8
460 할미꽃 (白頭翁) 관리자 2024.04.10 8
459 47년 전통 이상문학상 운영사 바뀐다 관리자 2024.04.24 8
458 [림삼의 초대시] 빗속의 해후 관리자 2024.04.29 8
457 쑥스러운 봄 - 김병중- 관리자 2024.05.03 8
456 2024년 5월 27일 메모리알 데이 - Happy Runners Marathon Club 관리자 2024.05.27 8
455 트바로티 김호중이 수감된 구치소에서 매일 아침 일어나는 일 관리자 2024.05.30 8
454 양대박 창의 종군일기 관리자 2024.06.16 8
453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이한기 2024.06.26 8
452 악의 평범성/지은경 이한기 2024.07.02 8
451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모두 비가 샌다 송원 2023.12.03 9
450 소월에 대하여 관리자 2023.12.04 9
449 더 깊이 사랑하여라 - J. Gaolt- 관리자 2023.12.04 9
이전 1 ... 3 4 5 6 7 8 9 10 11 12... 31다음
첨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