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 게시판에는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비방이나 험담은 자제 해주시기 바랍니다

산정묘지山頂墓地 1- 조정권

관리자2024.01.01 17:02조회 수 12댓글 0

    • 글자 크기

 

 

 

 

 

산정묘지山頂墓地 1

                               -  조정권 -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 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 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 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시집 산정 묘지, 1991)

 

 


 

 

조정권은 1977년 첫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를 발간했다.

당시 시인 박목월은  조정권의 시를

 “이미지의 강렬성, 언어에 대한 지극히 개성적인 민감한 반응과 시간의 긴장감” 이라고 하셨다

 

 

2024년 1월 1일 월요일

 

* 김 수영 신입회원께서 좋아하셔 카톡에올리셨던 시입니다

 

 

 

    • 글자 크기

댓글 달기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41 시창작을 위한 일곱가지 방법4 배형준 2022.01.23 59
640 신입회원 강이슬4 강이슬 2019.01.18 137
639 새해 문안 인사가 늦었습니다 .4 정희숙 2018.01.22 62
638 위안과 치유로서의 문학3 강화식 2022.08.05 62
637 나태주 시인의 강의 자료3 강화식 2022.08.04 213
636 비가 내리면/정헌재3 keyjohn 2022.04.16 102
635 시 창작 초기에 나타나는 고쳐야 할 표현들/도종환3 배형준 2018.01.28 355
634 회원보고 권한이 없다고 하는 경우는 무엇인가?3 Jackie 2018.01.12 121
633 [문학강좌] 구명숙 교수 특강3 hurtfree 2017.06.12 114
632 시 쓰기2 Wslee 2024.02.11 150
631 공존의 이유 시:조병화 글:김현욱2 배형준 2022.10.21 54
630 애틀랜타 문학회 10월 정모 결과 보고2 keyjohn 2022.10.10 79
629 8월 애문 정모 결과 보고2 keyjohn 2022.08.08 60
628 유성호 평론가(한양대 교수) PPT2 강화식 2022.08.04 73
627 LA 미주한국문인협회 웹사이트에 올린 여름문학 축제 포스터2 강화식 2022.08.04 159
626 문정영 시인 초청 문학특강2 강화식 2022.06.06 64
625 3월 애문 정모 결과 보고2 keyjohn 2022.03.14 53
624 문학평론가 유성호( 문학축제 강사) 영상 특강2 keyjohn 2022.02.26 59
623 시적장치의 삼각도2 배형준 2022.01.23 67
622 2021년 2월 모임 기록2 keyjohn 2021.02.15 95
이전 1 2 3 4 5 6 7 8 9 10... 34다음
첨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