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 게시판에는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비방이나 험담은 자제 해주시기 바랍니다

산정묘지山頂墓地 1- 조정권

관리자2024.01.01 17:02조회 수 5댓글 0

    • 글자 크기

 

 

 

 

 

산정묘지山頂墓地 1

                               -  조정권 -

 

겨울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산정(山頂)은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 쓴 채

빛을 받들고 있다.

만일 내 영혼이 천상(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천상(天上)의 일각(一角)을 그리워하리.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저 아래 흐르는 것은 이제부터 결빙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침묵하는 것.

움직이는 것들도 이제부터는 멈추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노래가 되어 침묵의 동렬(同列)에 서는 것.

그러나 한 번 잠든 정신은

누군가 지팡이로 후려치지 않는 한

깊은 휴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리.

하나의 형상 역시

누군가 막대기로 후려치지 않는 한

다른 형상을 취하지 못하리.

육신이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

헛된 휴식과 잠 속에서의 방황의 나날들.

나의 영혼이

이 침묵 속에서

손뼉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한다면

어느 형상도 다시 꿈꾸지 않으리.

지금은 결빙하는 계절, 밤이 되면

물과 물이 서로 끌어당기며

결빙의 노래를 내 발밑에서 들려 주리.

 

여름 내내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하여

계곡을 울리며 폭포를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얼어붙어 있다.

계곡과 계곡 사이 잔뜩 엎드려 있는

얼음 덩어리들은

제 스스로의 힘에 도취해 있다.

결빙의 바람이여,

내 핏줄 속으로

회오리 치라.

나의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의 전신을

관통하라.

점령하라.

도취하게 하라.

산정의 새들은

마른 나무 꼭대기 위에서

날개를 접은 채 도취의 시간을 꿈꾸고

열매들은 마른 씨앗 몇 개로 남아

껍데기 속에서 도취하고 있다.

여름 내내 빗방울과 입맞추던

뿌리는 얼어붙은 바위 옆에서

흙을 물어뜯으며 제 이빨에 도취하고

바위는 우둔스런 제 무게에 도취하여

스스로 기쁨에 떨고 있다.

 

보라, 바위는 스스로의 무거운 등짐에

스스로 도취하고 있다.

허나 하늘은 허공에 바쳐진 무수한 가슴.

무수한 가슴들이 소거(消去)된 허공으로,

무수한 손목들이 촛불을 받치면서

빛의 축복이 쌓인 나목(裸木)의 계단을 오르지 않았는가.

정결한 씨앗을 품은 불꽃을

천상의 계단마다 하나씩 바치며

나의 눈은 도취의 시간을 꿈꾸지 않았는가.

나의 시간은 오히려 눈부신 성숙의 무게로 인해

침잠하며 하강하지 않았는가.

밤이여 이제 출동 명령을 내리라.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나의 핏줄을 나의 뼈를

점령하라, 압도하라,

관통하라.

 

한때는 눈비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한때는 바람의 형상으로 내게 오던 나날의 어둠.

그리고 다시 한때는 물과 불의 형상으로 오던 나날의 어둠.

그 어둠 속에서 헛된 휴식과 오랜 기다림

지치고 지친 자의 불면의 밤을

내 나날의 인력으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어둠은 존재의 처소(處所)에 뿌려진 생목(生木)의 향기

나의 영혼은 그 향기 속에 얼마나 적셔두길 갈망해 왔던가.

내 영혼이 내 자신의 축복을 주는 휘황한 백야(白夜)를

내 얼마나 꿈꾸어 왔는가.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영혼이 그 위를 지그시 내려누르지 않는다면.

(시집 산정 묘지, 1991)

 

 


 

 

조정권은 1977년 첫 시집 <비를 바라보는 일곱 가지 마음의 형태>를 발간했다.

당시 시인 박목월은  조정권의 시를

 “이미지의 강렬성, 언어에 대한 지극히 개성적인 민감한 반응과 시간의 긴장감” 이라고 하셨다

 

 

2024년 1월 1일 월요일

 

* 김 수영 신입회원께서 좋아하셔 카톡에올리셨던 시입니다

 

 

 

    • 글자 크기

댓글 달기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66 늑대를 아시나요?!2 Jenny 2019.04.15 178
565 시를 찾아가는 아홉 갈래 길2 배형준 2018.01.28 246
564 인터넷 카페 닉네임 일화.2 정희숙 2017.10.13 131
563 당신을보는 순간 한눈에 반했소.2 정희숙 2017.10.05 105
562 사진방에 사진 올렸습니다~^ㅡ^2 Jenny 2017.08.16 63
561 한 번쯤은 봐둘 만한 "시어사전" 詩語辭典2 관리자 2017.05.05 103
560 유당 선배님 이야기가 로뎀 소개와 함께 있네요2 keyjohn 2017.03.15 142
559 질문2 왕자 2016.08.22 58
558 질문2 왕자 2016.08.19 68
557 출판기념회2 왕자 2015.11.21 126
556 홈페이지에 대한 의견 주세요2 관리자 2015.02.12 409
555 노년 예찬(老年 禮讚)1 이한기 2024.06.17 42
554 나상호 노인회장 94세로 별세1 관리자 2024.03.28 18
553 이정무 이정자 회원 4월2일 축하연을 위해 준비모임1 관리자 2024.03.28 15
552 봄날 고천 김현성1 관리자 2024.02.20 25
551 시력 60년 신달자 시인 위로의 언어들1 관리자 2024.02.09 16
550 [아메리카 NOW] 여야 정쟁 사라진 로잘린 카터 여사 장례식을 보면서1 관리자 2023.11.30 16
549 나태주 시인님의 시화 감상해 보세요-장 붕익 선생님께서 단체 카톡방에 올려 주셨습니다1 관리자 2023.11.14 40
548 제 8 회 애틀랜타 문학상 심사평1 석정헌 2023.09.29 58
547 유성호 교수님 PPT 21 강화식 2022.08.04 65
이전 1 2 3 4 5 6 7 8 9 10... 31다음
첨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