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의 시대에 개인이 대처하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다.
시류에 휩쓸리거나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내적인 평화를 희구하거나.
모기지 페이 오프후 '적당히 벌고 잘살자'를 모토로 정신적 귀족주의를 선택한 것은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는 나에게는
적당한 생활패턴이라고 자족하는 편이다.
물론 나의 이런 노선이 가족이나 주위사람들에게 입히는 부지불식의 피해는 운명주의라는 또 다른 합리화로 포장하면
깊은 잠 못잘 것도 없다.
작금의 겹치는 혼란의 파고를 견디기 위해 유년의 추억 한장을 오려내 불행의 파고가 내적인 평화의 벽을 넘지 못하도록
칸막이 용도로 사용하려 한다.
방학이면 입하나를 더는 목적으로 나를 평택할머니 댁으로 귀양보내는 어머니의 슬픈 표정과는 달리 나는 미제 초코렛과
짭짤한 베이컨, 미군들의 비상식량 C ration에 대한 기대로 어머니의 포옹을 떼어내기에 바빴다.
할머니는 지금의 한미연합사령부인 캠프 험프리스 뒷문 근처에서 여관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여관은 'walk in,고객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고객은 미군과 살림사는 여자들이었다.
할머니 다음으로 나를 환대하는 수지아줌마도 할머니 여관 방하나를 빌려 미군과 살고 있었다.
아줌마의 과한 환대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포옹이 끝나면 쏟아지는 미제 물건들 세례에 찌든 담배냄새까지도 참을만 했다.
아줌마의 아들이 살아있으면 내 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부터는, 아줌마의 포옹을 힘주어 푸는 대신 단풍잎같은 손으로
아줌마의 등뒤를 토닥거리는 적선을 하기도 했다.
궂은 일 후에 처방받는 등토닥거림은 마음의 격랑과 신체적 흥분을 가라앉히는 묘약임을 체험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할머니와 수지아줌마의 환대가 끝나면 나의 다음놀이는 수지아줌마 침대에서 점프하는 것이었다.
심슨 소위가 오기전까지 나의 트램폴린 놀이는 계속되었다.
뛰는 간간히 초코렛과 C ration캔을 따주는 수지 아줌마는 진정코 한번도 침대에서 뛰는 나를 책망하지 않았다.
수지아줌마의 남자친구 심슨소위가 퇴근하면 내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심슨 옆에서 나는 미제 주전부리를 하며, 주문같은 팝송을 듣는 즐거움을 만끽했다.
수지 아줌마보다 열살은 어려보이는 심슨을 통해 듣고 익힌 생애 첫 팝송은 The animals의 House of the rising sun이었다.
뉴올리언즈의 빈민가의 소년이 '신이여 아시나요. 내가 해뜨는 집의 가난한 소년입니다.'라고 하는 대목을 나는 좋아했고,
뜻도 모르면서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이국의 소년을 심슨을 블랙코미디 보는 것처럼 즐겼던 것 같다.
심슨과 수지와 나의 파티는 할머니가 '이놈의 자식 할미보다 양코배기를 더 좋아한다니까' 하는 지청구를 하며
문을 두드릴때까지 계속되었다
주한미군은 보통 일년 계약기간으로 한국에 주둔하는 데, 심슨은 수지와의 연애로 일년을 연기하게 되었다.
어느 날 내가 아줌마 침대위 트램폴린 놀이보다 더 높이 뛰며 좋아할 일이 일어났다.
수지와 심슨은 할머니에게 결혼하면 나를 입양해 미국으로 데리고 가고 싶다는 제안을 했고, 딸의 짐을 덜어 줄 요량으로 할머니는
어머니에게 나의 입양을 강권했다.
물론 나는 두손들어 만세를 불렀다.
입양이야기가 나온 날 수지 아줌마와 나는 심슨 주니어, 자기가 좋아하는 폴 뉴만의 이름에서 폴등 내 입양후 이름까지 고민하며 밤을 새웠다.
그 날 이후 나는 가본 적도 없는 미국병을 단단히 앓았다.
형의 펜맨쉽 숙제를 대신하기도 하고, 싸구려 마아가린에 밥을 비벼먹으며 미국적응 훈련을 해댔다.
그해 겨울방학이 되기 전에 평택발 새드무비는 슬픈 종말을 맞이했다.
휴가차 미국에 간 심슨이 함흥차사가 되었다.
알고보니 휴가가 아니고 계약기간이 끝나 귀국한 것이었다.
젊디 젊은 미군과 나이많은 현지처 사랑과 그 위태로운 사랑사이에서 잠시나마 새마을 운동처럼 요란했고 Animals의 노래처럼
처연한 소년의 어메리칸 드림은 유산되었다.
다음 방학에 만난 수지아줌마는 스티브 상병과 살고 있었다.
기분좋은 디오도란트 향기를 가진 심슨과 달리 디오도란트를 쓰지 않는 스티브는 한참 업그레이드 된 C ration으로 역한
겨드랑이 냄새를 견디게 해 주었다.
미군부대 기지촌 저녁은 호박색 가로등 불빛이 이국적 애수를 흩뿌리며 시작된다.
하루저녁 수지의 손을 잡고 스티브를 따라 간 부대안 사병클럽에서 나는 감자튀김을 먹고 있었다.
술에 취한 스티브는 주크박스에서 음악을 고르고 있었고 수지아줌마는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나는 장교클럽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수지아줌마를 찾을 수 있었다.
장교클럽을 보며 심슨을 추억하는 아줌마를 보는 일은 어린 나에게도 슬펐다.
단풍잎 떼라피의 효능을 믿는 나는 어깨 들썩이는 수지아줌마의 등을 다른 때보다 서너배 쯤 길게 토닥거려 주었다.
초코렛이나 C ration 유혹보다 강력한 무엇이 나를 할머니집에서 멀리 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독고탁이나 김종례만화나
범우사문고가 아니었나 싶다.
그 후 할머니집 가는 일과 수지아줌마를 보는 일은 차츰 뜸해져 갔다.
치매로 수년을 앓다가 돌아가신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만난 수지 아줌마는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쓸쓸한 함박웃음으로 나에게 다가온 아줌마의 손끝에는 말보로 담배가 타고 있었고, 말보로를 끼고 살던 심슨소위 생각도 잠시 했었다.
이제 LED 등불이 저녁을 밝히는 캠프 험프리스 후문의 백조여관은 호박색 등불과 함께 사라지고 지금은
낯선 이들의 존재와 부재로 채워지고 비워질 것이다.
거리는 지나는 수많은 심슨과 스티브들속에서 노란머리를 틀어 올리고 말보로를 피우는 수지 아줌마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LED 창백한 가로등 아래서 혀짧은 소리로 팝송을 따라하는 또 다른 나를 만날지도 모른다.
현실은 아프지만 환상은 달콤하고, 불행의 교향곡이 세상에 울려 퍼져도 추억이 만드는 카덴자로 우리는 잠시나마 행복을 꿈꿀 수 있으리라.
*글쓴이 노트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조차 뜸해진 요즘
인종주의가 또 다른 혼란으로 우리를 덮쳤다,
추억조각을 꺼내 닦고 맞추는 일이 부질없으나
이 작업은 명상이요 침묵이요 결국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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