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포옹/김복희
어제 8시 S교회에서는 후배 탈렌트 임동진 목사님의 집회가 있었다.
꼭 만나고 싶어 B전도사님과 시간 전에 달려갔다.
예배당 맨 앞줄에 앉아있는 목사님의 뒷모습이 보인다.
집회 시작 전에 만나야 될 것 같아 그의 앞으로 갔다.
서울서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살았으니 거의 20여년 만에 상봉이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둘은 지남철처럼 뜨거운 포옹을 하였다.
나는 웃고 있었지만 눈물이 계속 흘렀다. 목사님도 손수건을 적신다.
내가 아틀란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찾아와서 너무 반갑다고 하며 잡은 손을 놓지 못한다. 고국에서 지인들이 오면 반갑게 만나지만 유독 연기자만은 참지 못하고 나는 눈물을 보인다. 임목사님은 그 마음을 이해한다며 “아이구 내 새끼..” 이런 감정일거라 한다.
목사님의 간증을 경청하고 정말 훌륭한 목사님이구나 감탄을 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다시 확신하게 되었다. 아홉 살 어린 시절에 인천의 적산 가옥에서 가난을 비관한 엄마의 자살로 슬픈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대목에서 성도들은 숨을 죽인 채 놀랐다.
70대 중반의 목사님이지만 연극배우 특유의 좋은 발성과 감정표현이 성도들을 은혜의 늪에 빠지게 한다. 목사 이전부터 그는 남에게 존경받는 연기자였다. 스타이면서 겸손하고 남에게 모범적이었다.
임목사님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나와는 많은 작품을 같이 하지 않았지만 어느 단막 작품을 같이 할 때였다. 야외촬영이 있어 차가 갈수 없는 오솔길을 자기 소품을 들고 현장으로 가고 있을 때다. 뒤에서 달려와 내가 들고 가는 가방을 빼앗아 들고 가는 것이다. 젊은 후배들도 있지만 내가 선배인지라 후배로서 솔선하여 내짐을 뺏어 간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나는 그 일을 잊지 않고 있다. 늙어 타국에 나와서 반갑게 만나게 되고 내가 이렇게 글을 쓰기도 하니 그 장면을 꼭 쓰고 싶어 회상을 하고 있다. 그는 전혀 기억 못하고 있을 것이다. 간증 중에 젊어서 못 되게 살았다고 하지만 지나친 겸손이며 목사로서의 회개의 심정일 것이다. 온화하고 따뜻한 마음씨여서 지금 그는 목사 역할이 적역을 맡은 것이다. 18년 전 촬영문제로 아틀란타에 왔다가 김포에 도착하면서 뇌경색으로 고생을 하였는데 지금은 완치가 되었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한다.
연기자는 은퇴가 없으니 우리에게 훌륭한 배우로 다시 화면에서 보여 지기를 바란다.
어제 임동진 목사를 만난 후 오늘은 온종일 지난일이 스크린처럼 눈앞을 스치며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모처럼 걸려온 아들 전화조차 그다지 반갑지 못하니 이 마음이 무엇인지? 후회인지 그리움인지? 모르겠다. 이 상황을 아들에게 얘기 했다. 어미를 이해할까?
아니면 ‘어머니 연세가 몇이세요?’ 그런 마음일까?
작년까지는 내가 필요한 곳이라면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해가 바뀌며 나이를 생각하면서 조용한 은퇴자로 없는 듯 살아야 할 것 같다. 취미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것도 하나씩 줄이려 한다.
우선 한국의 고교 백합 문인회를 금년 들어 탈퇴선언을 하였다. 말리는 후배들도 나와 같은 생각들인 줄 안다. 나를 이해 할 것이다.
이곳에서 내가 만든 여고 동창회도 의도적으로 금년 들어 불참을 하였다. 차차 발을 빼야겠다. 떠나갈 자리를 정리하는 차원에서다. 최근엔 나눠주고 버리고를 실시하고 있다. 버릴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은 아니고 아까운 것을 줄 수 있는 마음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지인들로부터 생일 선물을 받으며 좋아서 냉큼 받은 내 꼴은 무엇인가?
내가 떠나기 전에 갖고 싶은 내 물건을 찜해 놓은 후배들이 있다. 잊지 않고 있다.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모두 나누어 줄 것이다. 떠난 자리가 쓰레기로 가득 할 것이 싫다. 금년까지는 건강하게 살고 싶다. 처음 늙어보니 변해 가는 놀라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너무 오래 살았다.
임목사에게 ‘나 많이 늙었지?’ 몇 번이나 물었다. ‘아니요 그대로세요’ 그 말 나는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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