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잔소리
석정헌
밤이 가장 짧다는 하지
흐린 날씨 때문인지 아직도 하늘은 캄캄하고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한데 부스스 뜬눈
이생각 저생각에 복잡한 머리 잠은 이제 달아나 버렸고
멍하니 누워 흐릿한 눈으로 천장을 본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단독으로 만나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러사아 월드컵 대 멕시코 전은 이길 수 있을런지
오늘은 비가 올려는지 하다 문득 생각난
옆집 처녀 믿고 있다 몽달귀신 된다며
밭에 물 주라는 아내의 잔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살며시 일어나 뒷마당 텃밭으로 나가 물을 준다
고추나무에는 제법 큰 고추가 몇 개 달렸고
이제 따서 냉국 해먹을 만큼 자란 가지도 서너개
바닥에는 잡초가 온통 잔듸밭을 이루고
굳은 땅에 자란 잡초 잘 뽑히지도 않는다
비 온 뒤에 다 뽑아 버려야겠다
가장자리에는 심지도 않은 깻잎 삼겹살 생각나게 무성하니
언제 한번 날잡아 지인들 불려 모아 소주나 한잔 해야겠다
따로 심어논 네 포기의 오이 그중 두포기는 노루가 먹어 치웠고
남은 두포기에 달린 오이 몇 개가 탐스럽다
어제 저녁 오이 장아찌를 양념에 버무리며
작년에 딴 마지막 오이라든 아내 얼굴이 떠오른다
물을 주고 일어서니 후두둑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이놈의 여편네 잔소리에 물만 허비 했다고 중얼거리며
집안으로 들어서니 벌써 아내가 출근 준비를 한다
비 오는데 물주라 했다고 투덜거리며 몸을 씻는다
뒷편 동쪽 하늘은 어둠을 밀고 여명이 밀려 오는데
아내 보기 민망하게 빗줄기는 약해졌고
그나마 차창에 몇 방울씩 떨어지든 비 그조차 멈추고
환해진 거리에는 꼬리를 문 무수한 자동차
멈춰선 빨간 신호등 위로 걸친 무지개를 보며
소녀 때처럼 예뻐하는 아내를 돌아 보니
40여년전 처음 만난 그날이 떠오른다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날 갑짜기 쏟아진 소나기
비그친 하늘에 아름답게 핀 무지개를 보며
예뻐다고 소리치며 환하게 웃으며 얼굴 붉히든 아내
이제는 보잘 것 없는 나의 그림자로만 살아와
세파에 시달려 주름진 얼굴
그러나 아직도 고운 미소는 얼굴에 잔잔 한데
지울 수 없는 세월의 흔적에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 가슴이 뭉클해진다
무료하고 나른한 오후 멍하니 보고 있는 창밖
물 주라는 아내의 역정 섞인 잔소리 듣지 않아도 좋을만치
미친 듯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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